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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31. <부정공>미서공휘인호묘갈명(嵋西公諱仁浩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33. <부정공>통정대부공휘원호묘갈명(通政大夫公諱源浩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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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부정공>석연공휘덕호행장략(石淵公諱德浩行狀略)
石淵公諱德浩行狀略 公諱德浩字仁瑞初以羽浩行者頗久石淵自號也系出玉川自麗迄我先德詳屢世狀碣高祖諱斗望曾祖諱一夏祖諱基協考諱鎭珪以宗議入系賞春公后參奉諱信之后基邦本生也妣扶安金氏瀷宗女 純廟甲午九月十三日生公于五山第嶷而秀弱不好弄在醜不爭纔知讀書不煩程督而儼然若老成天姿然也時尙擧業矣治程文文思贍敏十七八己有藝聲事親愛敬兼至侍癠憂形於色行不正履藥餌煎粥必躬親之壬子丙寅十許年間連遭內外艱哀毀逾制鄕隣稱善居喪世饒之業及當室而己剝落無餘然公恬不爲憂遂勵志讀書嘗以爲兵學亦非男子事乎携書入山房讀了幾月復向經史子集玩頤硏窮不得不措福川之野沙是公甥館而鱗次書籍可謂汗牛充棟故中歲僦居幾盡披閱至忘寢食於是府庫已實矣戊辰就正于奇蘆沙先生門如大學補亡章學未誠正修齊章四有五辟中庸致曲章動變之義是己承明快酬答精切指引因作계針錘拳拳服膺自後以躬以書問難相續其心悅誠服若七十子之於洙泗之門及先生奄棄後學公自以情雖摯而學未居業行心制三月安放之慟見於哀詞嗟乎世衰道徵士軌分裂如嶺人權鳳熙東敏輩誣蘆沙猥筆攻斥栗谷相繼投通猖狂叫呶無所不至公於是慨然而爲文命辨曰猥筆專主明理明理乃儒者第一義所謂理者泛論散在萬物者則固學者事若就原頭處而論之則豈世儒之所可易言乎惟我先生慨然乎世道之陵夷以發明義理爲己任而汲汲乎牖蒙矣見當世之學者多爲主氣之說紛紜不己而必以栗翁非有使之一句語爲宗旨有難之者副必曰先賢亦嘗云爾此猥筆所以不得巳而作也義理不可不明主氣不可不辨云此豈俗子阿好尙氣以快一時脣吻而巳哉盖其平日信先生篤知先生深而有是也聞崔勉庵先生爲國家秉執大義於人之見靡始不如渴思飮而貧病莫逐屢致書以道幷世之幸壬寅勉庵遊歷方才御者南爲秉憲先期멐從爲傳先生行止公曰此吾生平巢高景而今行聲光密邇若一任老病而自沮則晨夕泉臺將爲千古遺恨遂强策衰憊相見於華嚴禪房得罄交懽作詩見志及馬島捐館器之以詩其事賢友仁之誠固如此南原申錫仲聞公風義而踵門公一見樂爲之館曰論古人詩文文詳明而不遺語天下事物旁通而無滯絶群其倫遂迭爲賓主甘苦與及夫有疾不淑公爲之悲如親戚殮殯凡百躬自宣力以待本家歸葬於是乎公之尙悳急難可驗其一段丙戌聞屋社之報雖病枕昏憒之中乃仰屋長吁不覺雪涕自是連哭冡子介婦之慽病情轉劇至癸丑六月十九日臯復于龍崗寓舍享年八十以共同墓事有時禁即厝于錦城山夫人墓側配晋州河氏縣監百源孫澋女擧一男繼配宜寧南氏翼起女擧三男男長秉時孝順雅飭娶長澤高濟咸女無育次秉乙娶晋州姜廷孝女生二男秉疇娶驪興閔彩鎬女生一男秉琳娶草溪鄭振鎬女孫男燮以次房出系宗餘幼不盡擧嗚呼公氣稟篤厚神彩精明望之溫仁自然近道尤篤於倫理痛蚤年風樹每忌日齊素如見所爲齊將事哭泣哀動傍人性度眞率絶無邊幅畦畛又得大賢依歸門路旣正以淸明雅粹之資價勤敏精實之工篤志堅操不爲貧賤所移潜光晦彩不爲富貴所撓嘗入場人有啖利代搆者而不許知府擧對策員而不應與同知友生每諷詠於春暄秋涼之際山深林密之間前有觀善契後有相觀會或行飮禮讀法或講論經史或唱和詩韻翛然有出塵之像爲文止於辭達而甚有氣力於詩甚僻好隨意命詞斐然成章賞鑑者皆稱其力量之廣濶氣格之雄偉徃徃出入乎元和長慶之間終焉溯洄乎濂洛淵源性素嗜飮而醉愈溫克攝儀攸謹與人交恩義備洽疏遠輸款强暴致恭少嬰疾攝理有道未嘗以委頓沈困或廢着書不務涉獵必求實得而所致力者小學訓義心經附註庸學或問等篇是也至若毋自欺愼其獨思無邪毋不敬等語乃一生軆驗者也勸進後生各因其材而俾有所成就者多有詩文若干市衍之嗚呼循循雅飭休休氣味今不可復見俯仰惻悵曷可言喩顧秉憲於公俱是都事府君裔孫重之以文字之好其情誼綢繆密若至親凡係公身後事義不敢辭然窃恐老多顚錯不能發揮百一其咳唾之掇拾事行之敍次又與宗內舊識寅錫多有所啇確或不至大悖耶後欲知公之平生者盍於此而攷焉 族姪 秉憲 謹述 석연공휘덕호행장략(石淵公諱德浩行狀略) 공의 휘는 덕호(德浩) 자(字)는 인서(仁瑞) 처음엔 우호(羽浩)란 이름을 오랫 동안 써왔고 호(號)는 석연(石淵)이다. 관(貫)은 옥천(玉川)으로서 고려말부터 우리 선세의 덕망이 여러 선대의 장갈(狀碣)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조의 휘는 두망(斗望), 증조는 일하(一夏) 조는 기협(基協), 고는 진규(鎭珪)인데 종의로 상춘공(賞春公) 후로 입계(入系)하고 참봉(參奉) 신(信)의 후 기방(基邦)은 그의 본생부이며 비(妣)는 부안김씨(扶安金氏) 익종(瀷宗)의 딸로 純祖 甲午年(一八三四) 九월 十三일에 오산(五山)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지각이 있어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하찮은 일을 다투지 않으며 글읽을 줄을 안 뒤로는 번거롭게 감독을 하지 않아도 엄연(儼然)한게 어른과도 같았는데 이것은 그의 타고난 천품이 원래 그랬던 것이다. 때마침 科擧 공부을 숭상하던 시대라 과문을 연마하여 문사(文思)가 민첩해졌다. 그리하여 나이 겨우 十七∼十八에 학문에 대한 명성이 있었다. 부모를 섬길 때는 애경(愛敬)을 다하고 병구완을 할 때는 걱정된 얼굴을 하고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쫓아 다니며 약쓰기와 미음드리기에 몸소 그일을 다하였다. 임자(壬子) 병인(丙寅) 십여년 사이에 부모상을 연거푸 당하여 슬픔으로 예법에 지나치게 하니 많은 사람이 집상(執喪) 처리를 잘한다고 그를 칭찬한다. 대대로 풍부했던 살림이 그뒤로 여지없이 떨어져 버렸는데도 공은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글읽을 뜻을 가다듣고, 「병서(兵書)공부도 남자의 할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수개월 읽다가 다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대로 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복천(福川)의 야사(野沙)는 공의 처가로 수레에다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쌓아두었는데 중년에 공이 이곳에가 寓居하며 거의 읽은 보람으로 그의 학식(學識)이 풍부해졌다. 그러던 무진년 노사(蘆沙) 기 선생 문하에 들어가 대학보망장(大學補亡章) 아직 미숙한 성정수제장(誠正修齊章)의 사유오벽(四有五辟:四有:忍·恐懼·好樂·憂患, 五辟:親愛·賤惡·畏敬·哀矜·敖情)·중용치곡장(中庸致曲章)의 변동하는 의의(意義)를 바로잡고 명쾌한 문답과 세밀하고 간절한 가르킴을 이어 그것으로 지표를 삼은 뒤 가슴깊이 새겨두었다. 그뒤부터는 몸소 찾아가 묻고 토론하기도 하고 편지로 문한하기도 하여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誠服하기를 흡사 공자(孔子) 문하의 七十 제자처럼 하였는데 선생이 문득 후학들을 버리고 돌아가시자 정은 지극했지만 수업을 직접하지 뭇하여 마음으로만 三월의 복을 입었는데 안방(安放)의 애통함이 애사(哀詞)에 보인다. 아! 세상이 쇠퇴하고 도덕(道德)이 희미하여 선비의 기강이 분열되더니 영남사람 권봉희(權鳳熙)·최동민(崔東敏)등이 「노사외필(蘆沙猥筆)」을 무함하고 율곡(栗谷)을 공척(攻斥)하여 서로 넘나들며 미친듯이 헐뜯어대니, 공이 이에 분개하여 글을 보내 변론(辨論)하기를, 『외필(猥筆)은 오로지 이치를 밝히려 함이다. 이치를 밝히려 함은 선비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치를 평범하게 만물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의논(議論)한다면 이는 학자들도 할일이거니와 만일 그 원두처(原頭處)를 두고 논(論)한다면, 어찌 세상 선비들이 쉽게 말할 바이겠는가! 그래서 우리 선생은 세도가 무너져가는 것을 슬프게 여겨 의리(義理) 발명(發明)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고 몽매한 후생들을 깨우쳐 주려한 것이다. 또 당시 학자들을 보면 대부분 주기설(主氣説)을 가지고 분분하면서 율곡선생(栗谷先生)이 말한(「비유사(非有使)」의 한구절 말로 종지(宗旨)를 삼고 또 힐난(詰難)하는 사람은 억지로 「선현(先賢)도 또한 일찍 그렇게 말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외필(猥筆)을 부득이해서 지은 것이다. 의리(義理)를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주기(主氣)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말이 어찌 속된 선비들이 패기로 한때 입술이나 쾌(快)하게 하는 그런 것과 같겠는가!』 하였다. 이렇게 말하였으니, 공의 평소에 선생 믿기를 돈독히 하고 알기를 깊이했던 것이 이와 같았다. 최 면암(崔勉庵) 선생이 국가를 위하여 대의(大義)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사람의 소견에 있어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음을 느꼈으나 가난한 데다 병까지 들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누차 편지만 올려 병세(併世)의 다행함을 말하였다. 임인년에 면암(勉庵) 선생이 지리산(智異山)을 유람(遊覽)할때 내가 모시고 가게 되었다. 그때이 사실을 공에게 알렸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내 평생에 숭배하던 분이다. 이제 다행하게도 그분의 성광(聲光)이 가까이 온다 하는데 만일 늙고 병들었다가 가 뵙지 않으면 이는 죽어서까지 천고의 한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노쇠한 몸을 이끌고 가 화엄사(華嚴寺) 선방(禪房)에서 서로 만나 절친한 사귐이 되어 시(詩)를 지어 뜻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뒤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세상을 뜨셨다는 소문을 듣고 시(詩)를 지어 통곡하였으니 그 사현우인(事賢友仁)의 성의가 이와 같았다. 어느날 남원(南原)에 사는 신 석중(申錫仲)을 정해주고 말하기를, 『고인(古人)의 시문(詩文)을 의논할 때는 자상하고 명확하여 조금도 빠트린 게 없고, 천하(天下) 사물(事物)을 말할 때는 두루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데, 그의 벗이 없구나!』 하고 마침내 그와 빈주(賓主)가 되어 감고(甘苦)를 같이 하였다. 그러다 그가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자 공은 친척이 죽었을 때처럼 슬퍼하였고 염빈(殮殯)이며 그밖의 모든 일을 몸소 주선하여 본가로 돌아가 장사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여기에서 또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 덕을 베푼 공의 처사 일단은 증험한 셈이다. 경술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록 병석의 혼미한 가운데 였지만 흐느끼는 그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연이어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죽음을 당하자 병세가 악화되어 계축년 六월 十九일 용강(龍崗) 자택에서 八十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당시 공동묘(共同墓)에 대한 시금(時禁)이 있어 곧바로 금성산(金城山) 부인묘 곁에 장사지냈는데, 부인은 진주하씨(晋州河氏) 현감(縣監) 백원(百源)의 손자 경(澋)의 딸로 一남을 두었고 계배(繼配)는 의령남씨(宜寧南氏) 익기(翼起)의 딸로 三남을 두었다. 장남 병시(秉時)는 효순아칙(孝順雅飭)하였으며 장택(長澤) 고제함(高濟咸)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자녀가 없다. 그 다음 병을(秉乙)은 진주(晋州) 강 정효(美廷孝)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을 낳았으며 병주(秉疇)는 여흥(驪興) 민 채호(閔彩鎬) 딸에 장가들어 一남을 낳았으며 병림(秉琳)은 초계(草溪) 정 진호(鄭振鎬) 딸에게 장가들었다. 손남(孫男) 섭(燮)은 차방(次房) 소생으로 종가를 이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어려서 쓰지 않는다. 아! 공은 기품(氣禀)이 돈후(敦厚)하고 신채(神彩)가 정명(精明)하여 보는 사람에 온화한 느낌을 주었을 뿐 아니라 법도에 맞는 그의 행동은 윤리적(倫理的)인 면에 더욱 힘을 썻으며 어려서 부모 여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언제나 제사날이면 재계(齋戒)하며 슬퍼하는 모습이 옆 사람을 감동케 하였다. 성격이 솔직하여 곁으로 꾸미거나 사이를 두는 일이 없었고 또 훌륭한 선생을 만나 배우면서 문로(門路)가 정해지자 청명아수(清明雅粹)한 자질에다 근민정실(勤敏精實)한 공부를 더하여 독실한 뜻 굳은 지조로 빈천(貧賤)에 끌려가지 않았고 광채(光彩)를 깊이 간직하여 부귀(富貴)에 흔들리지 않았다. 공은 또 과거장에서 어떤 사람이 받고 대신 써준다 하자 허락하지 않았으며 지부(知府)에서 대책원(對策員)으로 추거(推擧)해도 응하지 않고 동지우생(同知友生)과 함께 따뜻한 봄, 서늘한 가을이면 깊은산 울창한 숲 사이에 모여 관선회(觀善會)·상관회(相觀會)를 열어 행음예(行飲禮) 독법(讀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사(經史)도 강론(講論)하고 시운(詩韻)도 내어 창수화답(唱酬和答)을 하니 문득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었다. 글을 지을 때는 의사만 전달하려 하는데도 힘이 있었고 시(詩)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좋아하여 뜻 내킨대로 써도 아름다운 문장이 되어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의 역량(力量)의 광활(廣濶)함과 기격(氣格)의 웅위(雄偉)함을 칭찬하였고 공(公) 또한 원화장경(元和長慶:모두 당나라 연호로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등이 주축이 되어 많은 시를 펴냄. )시대의 인물을 배우다가 마침내 주 염계(周濂溪) 정 이천(程伊川)의 연원을 밟았다. 공은 또 술을 좋아했지만 취하면 더욱 온화하여 몸가짐을 조심하였고, 남과 사귈 때는 은의(恩義)를 베풀어 소원(疏遠)한 사람에겐 너그럽게 강포(強暴)한 사람에겐 공순하게 대해주었으며 어릴 때 병이 많았지만 모든 일에 절도가 있어 일찍 위돈침곤(委頓沈困)하다하여 이를 폐하지 않았다. 글을 볼 때도 건너 뛰는 법이 없었고, 단 그 실상을 구했으며 또 「소학훈의(小學訓義)」·「심경부주(心經附註:」·「용학혹문(庸學或問)」같은 글에 힘을 쏟았으며, 무자기(毋自欺)·신기독(愼其獨)·사무사(思無邪)·무불경(毋不敬)같은 말로 한평생 체험해 왔다. 후생을 가르킬 때는 각각 그 자질에 따라 가르켜 많은 사람을 성취(成就)케 하였다. 그리고 공(公)의 약간의 시문(詩文)이 인출되지 않은 채 있다. 아! 공의 순순(循循)한 풍모와 휴휴(休休)한 기미(氣味)를 이제는 다시 볼수가 없으니 천지간에 이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하리…… 공과 나는 도사부군(都事府君)의 후손(後孫)으로 서로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그 정의(情誼)가 지친(至親)같이 두터웠으니 공의 死後 일을 쓰는데 있어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늙어서 정신이 혼미하여 그의 해타(咳唾)의 모음과 행사(行事)의 서차(敍次)에 있어서 백분의 일도 발휘(發揮)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종내(宗内)간 인석(寅錫)과 함께 상의한 바 있으니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뒷날 공의 평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참고 해야 되지 않을까? 族姪 秉憲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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